지난달 19일 오후 1시에 찾아간 필리핀 카비테주 아구아도. 1층 가정집에서 대형견 한 마리가 짖어대는 소리 사이로 2층에서 아이 서너 명의 웃음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아이들이 아버지처럼 따르는 김영주(41) 선교사가 “필리핀 치안은 전반적으로 불안한 편이지만, 그래도 학교가 앞에 있어 이곳은 안전하다며 실내로 안내했다.
연두색 담벼락과 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엔 그늘진 통로를 따라 방 세 칸이 줄지어 있었다. 그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자, 하나씩 하나씩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 가운데 맏형인 멜키세데크(14)는 한 손에 성적 우수 학생에게 수여되는 동메달을, 다른 한 손에는 성적표를 들고 있었다. 따이따이 지역 빈민가의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멜키세데크는 현지인 목사의 소개로 이곳에 입소한 뒤 부쩍 밝아졌다고 한다. 그의 방에 있는 기타가 눈에 띄어 연주를 부탁하자, “아직 연습하고 있어 서투르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가 쥔 성적표에는 1학기 79점에서 2학기 91점으로 오른 음악 점수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모인 ‘그룹홈’이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높은 출생률(합계출산율 1.9명)로 시름하는 필리핀은 가난한 부모가 많은 자녀를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에 처했다. 저개발 국가에서 주로 이루어진 그룹홈 사업은 부모 역할을 하는 대신하는 ‘보모’를 통해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국제구호단체 ‘라이프오브더칠드런’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미 지역을 중심으로 그룹홈 21개소에서 95명의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룹홈 가정에서 만난 아이들은 보모를 ‘엄마(mama)’라고 부른다. 친모와 친부는 달라도 이들은 한 방 한 침대에서 형제·자매처럼 어울려 지냈다. 아이들의 보모 로워데스(51)씨는 한 지붕 아래 같이 머물며 아이들의 공부, 식사 등을 챙기고 있다. 보모는 아이들의 주거 해결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 간 다툼이나 교육 문제가 생길 때 부모를 자처하며 보호자 노릇을 톡톡히 해준다.
그룹홈 가정에 들어온 뒤 아이들에게 가장 빠르게 나타나는 변화는 건강 상태다. 무덥고 습한 기후의 필리핀에선 탄수화물 위주의 달고 짠 식단을 주로 먹는다. 로워데스씨는 식단에 아도보(닭볶음탕), 수니강(국물 요리), 찹수이(야채볶음) 등을 올려 아이들이 단백질과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도록 챙긴다. 충분한 영양소는 아이들이 변화하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알버트(12)군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물을 주워다 파는 일을 해왔다. 지난해 10월 그룹홈 생활을 시작한 뒤로 체중도 늘고, 무엇보다 웃음이 많아졌다고 한다. 입소 전에는 고물을 줍느라 매달 5~7일씩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지만 그룹홈 생활을 시작한 뒤로 더는 학교를 빠지지 않는다. 로워데스씨는 “읽는 게 서툴렀던 알버트가 타갈로그어(필리핀 공용어)와 영어도 잘 읽게 됐다”며 “아이가 선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계속 지켜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21일 필리핀 안티폴로에서 만난 박광수(66) 목사는 그룹홈의 목적이 아이들의 자립심을 기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역시 필리핀에서 30년 가까이 선교 활동을 해오다 지난 2017년 6월 보모와 3명의 아이를 데려와 그룹홈을 열었다. 그룹홈 건물 옆에 위치한 교회 안에서 아이들은 평소 원탁 책상에 둘러앉아 성경 공부를 하고 학교 숙제를 마친다. 그는 “아이들이 식사, 빨래 등 단체 생활을 통해 규칙적인 삶을 체화할 수 있다”며 “크리스천으로서의 품성을 기르고,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의지와 인생관도 기를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환 라이프오브더칠드런 간사는 “그룹홈은 아이들을 위한 단순 ‘시설’이 아니라 진짜 ‘집’을 지향한다”며 “현지에 맞는 평범한 가정 환경을 제공해 아이들이 사회적 차별 없이 학교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